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출판사 대표를 그만두고 개인 연구소를 차린 편집자가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독자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고자 전국 독서 동아리를 만나고 다녔다. 편집자로는 드문 행보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했던 前출판사 대표는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꾸려나갈지 즐거운 고민 중이다.


잘나가는 출판사 대표를 그만둔 사연
계획적인 커리어를 위해 출판사 대표를 그만뒀을 것이라 어림짐작했다. 장 대표는 딱 잘라 아니라고 했다. 지난 2014년 그에게 오십견(五十肩)이 찾아왔다. 담당 의사는 뇌졸중이 올 가능성이 있으니 무조건 일을 쉬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스트레스성 근육경직 증상이었던 탓에 어깨를 움직일 수도,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본의 아니게 일을 그만둬야 했다.

20년간 그는 수많은 책을 만들었다. 민음사 내 독립브랜드(임프린트)인 '황금가지'에서 발간된 ≪반지의 제왕≫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도 모두 장 대표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다. 출판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대표를 역임하기까지 노동을 감내한 결과 건강에 적신호가 왔고, 어쩔 수 없이 운명적인 휴가를 받아들였다. 대표로 지내면서 근로기준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그에게 워크홀릭 성향이 있었는지 묻자 '대한민국에서 대표직을 수행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사직서를 낸 다음, 치료 목적으로 친동생이 사는 시골서 텃밭을 가꾸는 일을 도왔다. 본인을 돌보기 위해 간 그곳에서 그는 다시금 출판을 생각했다.

"출판이라는 업 자체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실제로 독자가 어떤 책을 읽으며 왜 (그 책을) 읽는지 가장 궁금했습니다."

장 대표는 독서 동아리라고 불리는, 독자 공동체를 확인하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만났다. '출판의 위기'라고 불리는 오늘날, 독자를 발굴하는 방법 중 하나가 다양한 독서 동아리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독서란 '함께 똑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이다.

장 대표는 '기존에 도서 추천 목록은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뿌려지는 형태였다'며 그간 독서 추천 문화를 꼬집었다. 서울대학교나 삼성 등에서 추천하는 책들은 사실상 일반 시민에게 맞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독서 동아리의 목록은 이른바 '위에서 뿌려지는' 리스트와 그 맥락을 달리한다.


책만 바라보는 바보 편집자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던가. 현재 순천향대학교 미디어 콘텐츠학과 초빙교수로 적(籍)을 두고 있는 그는 학생들에게 출판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배우고 있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장 대표가 출판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단순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는 도서부장을 맡게 됐다. 당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어려운 살림에 부모님은 맞벌이했기에 방과 후 도서관에 틀어박혀 세계명작 동화를 읽었다. 그해 총 1,000권에 가까운 책을 독파했다고. 이 경험은 이후 장 대표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사보는 '읽기 중독자'가 된 계기가 됐다.

'헌책방에 갔다하면 그 자리에 선 채 문예지를 내내 읽었던 기억이 많아요. 자연스레 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도였던 그가 출판사를 직장으로 택한 것은 의아한 일이겠지만, 장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돈도 줘가면서 책을 읽게 해주는 좋은 직장'이 바로 출판사였다.

출판계에 오래 몸담다 보니 산업의 문제점이 또렷하게 보였다. 특히 2000년대부터는 새로운 저자를 발굴해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보다 기존 외서를 번역해 출판하는 문화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본문 편집을 잘하는 나라'로 통했다. 이는 동시에 소비자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책을 공급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그의 또 다른 직함이다. 퇴사 후 출판에 관한 담론을 제시하고자 차린 개인 연구소다. 출판 산업이 어렵다고 해도 장 대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출판은 단순히 저자의 원고를 받아 책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 사이를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 사업이라고 말이다.

"결국 인간과 책을 연결하는, 네트워킹을 발명하는 것이 출판의 본연적 사업입니다."

특히 그는 향후 중소출판사는 회사를 좋아하고 따르는 팬덤을 확보해야 한다며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기꺼이 출판사 마케터를 자청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지인 혹은 SNS 환경에서 맺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책을 추천하며 광고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간 출판사는 도서 마케팅을 대개 서점에 맡겨왔다. 이 방식은 점차 서점이 마케팅 주도율을 높여가면서 해당 비용을 요구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대형 출판사는 몰라도 중소출판사는 당연히 부담될 수밖에 없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출판사는 아이돌 팬클럽 혹은 연예기획사의 관점으로 팬을 조직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장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주 4일간 일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금요일, 그의 주말을 방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개의치 말라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냉철한 편집자의 이미지가 희석되는 순간이었다. 남들보다 긴 주말을 스스로 부여한 이 전문편집자는 당분간 책 쓰는 일에 주력하고자 한다. 편집자의 역량과 직무를 아우르는 ≪편집의 미래≫를 출간할 예정이다. 또 독서 동아리를 직접 만난 이야기와 그간 독자를 공부한 내용을 담은 책도 곧 만날 수 있다. 장 대표는 앞으로 비생계적인 일에 몰두하며 창의적인 인생을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인터뷰 전, 약속 장소에 먼저 와있던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두꺼운 역사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을 읽기 중독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책이 놓여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