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사 신사업팀의 리더는 프로젝트 초반 "자유롭게 의견을 내주세요. 정답은 없습니다"라고 강조했고, 팀 내에서는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출시 일정은 계속 미뤄졌고, 의사결정은 회의 때마다 번복됐다. 이후 경영진의 압박이 커지자 리더의 운영 방식도 달라졌다. 명확한 결정과 빠른 실행이 우선되기 시작했고, 토론은 줄어들었다. 결국 제품은 예정대로 출시됐지만, 분기 성과는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진행된 일대일 면담에서 한 팀원은 "사실 처음부터 의문이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이를 꺼내놓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조직의 변화는 같은 회사, 같은 팀, 같은 분기 내에서 벌어졌다. 시점에 따라 리더가 우선순위로 둔 가치가 변화했을 뿐이다. 이는 성과지향성과 포용적 문화를 동시에 강조하는 조직이라면 한 번쯤 마주해 보았을 풍경이기도 하다. ![]() 포용은 성과를 위한 조건 우리는 흔히 포용과 성과를 대립항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두 가치는 처음부터 궤를 같이한다.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개념을 널리 알린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 교수의 두 저서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진다. 에드먼슨이 2018년 발간한 저서 《두려움 없는 조직The Fearless Organization》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심리적 안전감은 '무엇을 위한' 안전감인가. 그 답은 성과와 학습이다. 그는 심리적 안전감을 '구성원이 의견·질문·우려·실수를 말해도 처벌받거나 굴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의하면서, 이 안전감이 높은 성과 기준과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학습 영역Learning zone'이 만들어진다는 매트릭스로 그 관계를 시각화했다. 심리적 안전감은 출발점부터 성과와 책임을 위한 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개념이 빠르게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제가 자주 누락됐다. A사의 사례처럼 '의견은 자유롭게'라는 슬로건만 남고, 결정과 책임의 기준은 흐려지는 조직이 늘었다. "이건 제 심리적 안전감을 침해하는데요"라는 말이 정당한 피드백을 차단하는 도구로 쓰이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회의가 같은 안건으로 반복되며, 누구도 명백한 성과 미달을 짚지 못한다. 어느새 '포용 = 비판 자제, 합의 우선, 책임 면제'라는 등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에드먼슨은 5년 뒤 또 다른 저서인 《옳은 실패Right Kind of Wrong》에서 같은 전제를 '실패'라는 다른 렌즈로 더 구체화했다. 심리적 안전감은 책임을 덜어 주는 장치가 아니라 정직한 갈등과 솔직한 피드백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며, 특히 새로운 영역에서의 '똑똑한 실패Intelligent failure'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포용이 성과와 무관하거나 대립한다는 전제는 잘못된 해석에 가깝다. 문제는 둘 중 하나를 잘못 적용하거나, 단계에 맞는 모드를 설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확산에는 시너지, 수렴에는 충돌 포용과 성과라는 두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이 일의 단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놓치면, 비판이 사라진 포용과 침묵을 강제하는 성과주의가 같은 팀 안에서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A사가 한 분기 동안 겪은 두 장면이 바로 그런 사례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최근 실증 연구로도 뒷받침된다. 카이스트·밀라노 공과대·조지아 공과대 공동 연구진이 호주 공공서비스 직원 6만여 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성과지향 분위기Go-getter climate와 포용적 분위기Inclusive climate가 동시에 강한 조직은 아이디어 도출 단계에서는 시너지를 만들지만 실행 단계에서는 충돌과 지연을 유발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같은 분위기여도 단계에 따라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 '이중성의 양면성Duality of duality'이 나타난 것이다. 에드먼슨이 《옳은 실패》에서 구분한 세 가지 실패 유형도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며 학습 자산을 남기는 '똑똑한 실패Intelligent failure', 익숙한 업무에서 부주의로 발생하는 '기본적 실패Basic failure', 여러 요인이 얽혀 발생하는 '복합적 실패Complex failure'로, 단계마다 환영받아야 할 실패의 종류도 달라진다. 확산 단계에서는 다양한 관점과 반대 의견, 엉뚱한 시도가 살아날 수 있도록 '똑똑한 실패'가 허용돼야 한다. 반면 수렴·실행 단계에서는 명확한 절차와 책임, 빠른 결정이 우선되기에 충분히 논의된 사안에 다시 '의견의 자유'를 무한정 허용하는 것은 포용이 아니라 실행력의 누수가 될 수 있다. 결정 이후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실행한다Disagree and commit'는 규범이 필요한 이유다. 리더는 모드를 선언하고, HR은 단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는 것은 리더와 HR의 의식적 설계다. 리더는 회의나 프로젝트의 시작 시점에 '오늘 우리는 어떤 모드로 일하는가'를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동시에 심리적 안전감을 '편안함'이 아니라 '솔직한 발언과 책임의 동반'으로 재정의해 일관되게 전달해야 한다. HR이 손봐야 할 과제도 있다. 첫째, 회의·프로젝트 운영 프로토콜에 확산-수렴 단계를 명확히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별로 요구되는 행동 규범과 허용 가능한 실패 유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셋째, 리더가 상황에 따라 두 모드를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도록 양손잡이 리더십Ambidextrous leadership 학습을 지원하는 것이다. 성과와 포용은 양자택일의 문제도, 단순한 합산의 문제도 아니다. 두 가치를 무조건 '조화'시키려 하기보다 상황과 단계에 따라 '안배'에 가깝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 어떤 순간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똑똑한 실패를, 또 다른 순간에는 명확한 결정과 신속한 실행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A사에서 벌어진 두 장면, 즉 넘치는 의견 속에서도 결정이 이뤄지지 않았던 초반과 빠른 결정 뒤에 본질적인 의문이 묻혀버린 후반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HR이 던져야 할 질문은 '얼마나 포용적인가' 혹은 '얼마나 성과지향적인가'보다 '우리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으며, 그에 맞는 문화와 행동이 작동하고 있는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좋은 문화의 총량을 늘리는 일만큼이나, 그 문화를 상황과 맥락에 맞게 운영하는 능력이 조직의 실행력을 좌우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황재호 상무는 DL이앤씨, 우미건설 등 건설 분야에서 30여 년간 조직문화와 리더십 개발, 육성에 기반한 성과 리뷰 등 다양한 인사 업무를 수행해 온 인사 전문가다. 현재는 우미건설에서 핵심가치에 기반한 조직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
|


